2025. 10. 19. 06:30ㆍ카테고리 없음

어느 순간부터 ‘외국 드라마’라는 말이 무의미해졌다. 화면 속 인물은 한국어를 쓰고 있지만, 자막 하나로 세계의 수많은 이들이 동시에 그 대사를 이해한다. 누군가는 낮에 보고, 누군가는 깊은 밤에 같은 장면에서 웃거나 울고 있다. 넷플릭스라는 창을 통해, 한국 드라마는 지금 세계와 마주보고 있다. 특별한 전략이 있었던 건 아닐지도 모른다. 그저, 사람 이야기를 조금 다르게, 조금 더 천천히, 그리고 깊이 들여다보았을 뿐이다. 그게 지금, 세계 여러 도시에서 한국 드라마가 사랑받는 이유가 되었다.
넷플릭스 - 사람들이 기억한 건 이야기였다
<오징어 게임>을 처음 본 사람들은 다 비슷한 말을 했다. "이런 드라마가 한국에서 나왔다고?" 모두를 놀라게 한 건 단지 설정 때문만은 아니었다. ‘게임’이라는 틀 안에 담긴 건 규칙도 경쟁도 아닌, 관계의 흔들림과 감정의 균열이었다. 특히 해외 시청자들에게 이 드라마는 낯설면서도 이해되는 이야기로 다가갔다. 돈 때문에 삶을 걸어야 하는 사람들, 신뢰를 시험당하는 인간관계, 그리고 그 안에서의 무력감. 드라마가 보여준 건 한국 사회의 단면이었지만, 동시에 보편적인 불안이기도 했다. 그건 미국의 관객도, 유럽의 관객도, 남미의 관객도 비슷하게 느꼈을 것이다. <지금 우리 학교는> 역시 표면적으로는 좀비 장르였지만, 안을 들여다보면 고등학생들의 감정 변화가 중심이었다. 친구를 구할 것인지, 자신을 지킬 것인지 선택의 순간마다 드러나는 감정의 디테일은 청춘의 불안과 혼란, 희망과 절망을 함께 보여준다. 그래서 좀비보다 사람이 더 무서웠고, 또 사람이 더 애틋했다. <더 글로리>는 복수극이라기엔 너무 조용하고, 너무 슬픈 이야기였다. 학창시절 겪은 폭력을 마음 깊이 묻은 채 어른이 되어 살아가는 주인공. 그가 준비하는 복수는 단순히 상대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, 스스로를 회복하는 과정이었다. 언어는 다르지만, 상처는 통했다. 해외 시청자들 역시 이 드라마 속 고요한 분노와 무너지는 침묵에 감정적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었다.
해외반응 - 낯선데 익숙하고, 익숙한데 낯선
한국 드라마가 세계에서 주목받는 이유는, '특이함' 때문이 아니다. 오히려 너무도 익숙한 감정을 낯선 배경과 방식으로 풀어내는 능력에 있다. 그래서 낯설지만 익숙하게 느껴진다. <사랑의 불시착>이 대표적이다. 북한 장교와 남한 재벌 2세 여성의 사랑 이야기라는 설정은 굉장히 독특했지만, 그 안에서 펼쳐지는 감정선은 고전 멜로드라마와 다르지 않았다. 언제나처럼, 사랑은 오해에서 시작되고, 진심이 확인되기까지 우여곡절이 따랐다. 그 감정은 남북이라는 정치적 틀을 넘어서, 그냥 ‘사랑’이라는 언어로 읽혔다. <이상한 변호사 우영우>는 조금 더 조용한 방식으로 세계와 닿았다. 우영우는 자폐 스펙트럼을 가진 변호사다. 그녀는 법정에서 누구보다 논리적이지만, 사람을 이해하는 데에는 늘 시간이 더 걸린다. 그 느린 속도가 오히려 많은 시청자들에게 따뜻하게 다가갔다. 세상을 보는 방식이 달라도, 마음을 나누는 방식은 비슷하다는 걸 이 드라마는 보여준다. 한국 드라마는 자극적인 사건보다는 감정의 온도를 따라가는 데 익숙하다. 그래서 갈등이 터지기 전의 침묵, 눈물이 흐르기 전의 떨림 같은 순간들을 놓치지 않는다. 그리고 그런 미세한 감정의 떨림이야말로, 세계 어디서든 통하는 언어일 수 있다.
감성언어 - 이야기에서 문화로, 문화에서 일상으로
어떤 이야기는 콘텐츠를 넘어서 문화가 된다. <이태원 클라쓰>의 단밤포차는 실제로 외국인 관광객들이 찾는 명소가 되었고, 드라마 속 주인공이 입은 옷이나 들은 음악은 틱톡과 유튜브를 통해 수없이 재생되었다. 그건 의도한 결과라기보다, 진심이 담긴 장면이 누군가의 일상 속으로 들어간 결과다. <킹덤>은 한국형 좀비라는 장르를 만들어냈다.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좀비물이라는 전무후무한 세계관은, 동양의 정서와 서양의 판타지를 자연스럽게 결합해 새로운 장르의 가능성을 보여줬다. 그 안엔 전염병, 권력, 계급, 절망, 희생 같은 주제들이 스며 있었고, 그 복합적인 주제는 언어와 국경을 넘어 통했다. 이런 흐름은 더 이상 드라마만의 것이 아니다. 한 장면, 한 대사, 한 곡의 음악이 누군가의 브이로그 배경음이 되고, 짧은 클립 하나가 수백만 뷰를 기록하며 다른 문화권으로 번져간다. 이건 단순한 시청이 아니라, 함께 호흡하는 감정의 경험이다.
한국 드라마가 세계에서 사랑받는 이유는, 그저 잘 만들어서도, 특별한 소재를 다뤄서도 아니다. 그 이야기들이 사람을 천천히 바라보고, 감정을 조심스럽게 다뤘기 때문이다. 어떤 드라마는 기억에 남고, 어떤 드라마는 마음에 남는다. 지금 세계 여러 곳에서, 낯선 언어로 된 자막을 읽으며 누군가는 웃고, 울고, 생각에 잠긴다. 그 장면 너머에 한국 드라마가 있다. 그리고 그 이야기들은, 이제 더 이상 ‘외국 드라마’가 아니다.